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(문단 편집) === 번외: [[오스만 제국]] ===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도 [[무슬림]]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 환영하지 않았다. 실제로 1571년 가톨릭의 [[신성동맹]]이 [[레판토 해전]]에서 오스만을 무찌르자 개신교 신자들도 기뻐했다. 대체로 오스만은 제국 내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, 서유럽의 분열상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. 대체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의 논리에 더 공감을 했는데, 이는 성상과 성화 등 이미지에 대한 공경을 우상숭배로 보는 이슬람은 개신교 쪽과 논리가 더 유사했기 때문이다. 국가적으로는 이 시기의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는 하였다.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[[합스부르크 왕조]]를 타도한다는 공통의 정치적 목적이 있어 맺은 동맹이었다. 당장 [[프랑스]]도 [[30년 전쟁]] 중 오스만이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고[* 30년 전쟁 후기로 가면 종교보다는 국가 단위의 패권 싸움이 주가 되지만, 그래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결이라는 큰 틀은 남아 있었다. 오스만의 참전은 이슬람교들이 참전한다는 점에서 이 틀을 근본부터 흔들 수 있었다.], 일정 수준의 견제만을 바라는 정도였다. [[오스만 제국]]은 이 역할에는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어서 독일 개신교 신자들에게 대응하려던 [[카를 5세]]의 주의를 돌려놓고, [[펠리페 2세]]가 [[스페인령 네덜란드]]의 반란에 주력하지 못하게 했다. 물론 오스만도 아무 이득 없이 맺은 동맹은 아니어서, 이 동맹을 통해 오스만은 [[발칸 반도]]와 [[오스만 헝가리]]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굳게 다질 수 있었다. 서유럽에서 루터파-칼뱅주의자-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굴을 당하던 [[재세례파]]는 [[오스만 제국]]에서 그 어떤 유럽 국가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안전을 보장받았다. 이러한 과정을 통해, 제국 내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복수의 종파가 공존하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